고대에 플루트나 아울로스(Aulos, 고대 그리스의 겹리드 관악기) 같은 관악기들이
'이교도의 것' 혹은 '저속하고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던 이유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신화, 그리고
초기 기독교(중세)의 종교적 관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크게 4가지 이유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디오니소스 축제와 육체적 쾌락의 상징
고대 그리스에서 현악기인 리라가 이성의 신 '아폴론'을 상징하며
절제와 평온을 뜻했다면, 플루트류의 관악기는
술과 황홀경, 축제의 신인 '디오니소스'의 악기였습니다.
관악기는 주로 술 파티, 광란의 종교 의식, 성적인 축제에서
흥을 돋우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도덕과 이성을 중시하던 철학자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은
관악기 소리가 사람의 정신을 나약하게 만들고
이성을 마비시켜 감정적·육체적 쾌락에 빠지게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2. 신화 속 '저주받은 악기'라는 인식
그리스 신화에는 플루트(아울로스)의 기원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처음에 이 악기를 만들어 불었는데,
거울을 보니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고 얼굴이 못생기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불쾌해하며 악기를 던져버리고 저주를 내렸습니다.
이 악기를 주운 반인반수의 괴물 마르시아스가 아폴론의 리라와
연주 대결을 펼쳤다가 패배해 살가죽이 벗겨지는 끔찍한 벌을 받습니다.
이 신화는 고대인들에게 "관악기는 신성한 이성(리라)에 도전하는
불경하고 기괴한 악기"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3. 초기 기독교의 '로마 박해'에 대한 기억
교회가 권력을 잡은 중세로 넘어가면서 관악기에 대한 거부감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로마 제국 시절, 기독교인들이 콜로세움 등 경기장에서
순교하거나 박해를 받을 때 축제 분위기를 띄우고 군중을 선동하기 위해
불었던 악기가 바로 플루트와 나팔 같은 관악기들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관악기 소리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교도(로마)의 잔혹한 축제 소리'이자
'순교자들의 피 냄새가 나는 소리'로 기억되었던 것입니다.
4. 예배에 부적합한 '기능적 문제'
초기 교회는 가사가 없는 기악 음악 자체를 경계했고,
사람의 목소리로 부르는 찬양(성가)만을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리라나 하프 같은 현악기는 연주하면서 동시에
입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반면 플루트 같은 관악기는 입으로 불어야 하므로
찬양의 가사를 전달할 수 없고,
오직 인간의 감각과 흥만 자극한다고 보았습니다.
재미있는 반전
이러한 완고한 거부감 때문에 중세 교회는 아주 오랜 기간 교회 안에서
관악기 사용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심지어 오늘날 교회 음악의 상징과도 같은 파이프 오르간조차도
수많은 파이프(피리)로 소리를 내는
'관악기의 거대한 집합체'라는 이유로, 이교도의 악기라며
오랜 세월 교회 문턱을 넘지 못하다가 중세 후기에야 겨우 받아들여졌답니다.
